하루키 내면의 흐름을 환상적으로 보여주는 최고의 단편집
허무주의의 대표적인 작가로 평해지는 사람. 부서질 것만 같은 유리 같은 문체로 잃어버린 것들과 뒤에 남은 사람들의 비애를 그려낸, 그러나 그 속에서 자그맣게 빛나고 있는 가능성 -혹자는 희망이라 부를지도 모른다- 를 결코 놓치지 않는 사람. 무라카미 하루키.그러나 적어도 이 책에서의 하루키는 다른 작품에서의 모습과는 좀 다르다. 그는 여기에서 허무와 상실 이후의 다른 것을 노래하려고 한다. 여전히 그의 오싹할 정도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때로는 서글프게, 때로는 신랄하게, 때로는 음침하게. 그리고 그 특유의 감칠맛 나는 아름다운 문체 속에는 그가 바라보고 비판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본질적인 공포가 짙게 깔려있다.표제작인 'TV 피플'의 경우, 주위 사람들과 단절되어 결국 아내에게마저 버림받고 7할로 축소된 채 언어를 상실해 버리는 '나'라는 인물을 통해, 현대 사회에서의 인간의 가치 상실과 존재감 축소에 대해 우회적으로 비판한다.
'비행기'의 경우 시를 읽듯 혼잣말을 하는 사내와 모든 것이 갖춰졌음에도 불구하고 불륜을 통해 자신의 고독을 달래는 유부녀를 통해 치유될 수 없는 현대인의 빈자리를 그려낸다. 그 외의 단편들 역시, 문득 주위를 둘러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현대인들의 암담함과 두려움을 상징적이고 우화적인 에피소드로 표현해 낸다.'가노 크레타'를 비롯하여 이 책 속에는 훗날 쓰일 '태엽 감는 새 연대기'의 베이스가 되는 에피소드들이 곳곳에 숨겨져 있다.'태엽 감는 새 연대기'는 하루키가 이제 더 이상 상실과 허무의 작가이길 거부하며 주변으로 눈을 돌려 새롭게 현실을 재인식하는 교두보적인 작품이다.
이 단편집은 여타의 하루키 책들과는 달리, 읽고 난 뒤에도 앙금 같은 것이 공포심 비슷한 형태로 가슴에 남는다. 다른 작품들이 '마치 손끝에서 맴도는 반딧불'같은 슬프지만 아름다운 상실의 달콤한 고통을 노래했다면, 이 작품집은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하고 본질적인 두려움을 그려냈다. 그리고 이 책을 읽는 우리가 그 두려움에 공감해 버리게 되는 까닭은, 결국 우리 역시 이 책 속의 주인공들처럼 자신 외에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슬픈 현대인의 삶을 영위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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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